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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찰스 다윈

찰스 다윈은 영국의 지질학자이자 생물학자로서
진화론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철학자이며 박물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등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위리스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 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했다.
다윈은 우생학 이론을 창시하였던 골턴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는 과학의 거부 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 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다양성을 설명한다.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지동설 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성을 뒤집고 새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됬다

로잔대학의 다니엘 셰릭 교수는 다윈은 사람과에 속한 두 종이 서로 연관이 있고 이들이 공동의 조상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급을 한 바가 있다. 다윈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몇 쌍의 겹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비뚤어질까봐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 사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가는 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를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에라스머스는 화학 실험에 집중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하였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을 만나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고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다.
1817년부터 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는데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육을 지식전수로 잘못 이해하여
학생만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여
교사에게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고 욕을 듣기도 했다
1818년 다윈은 슈루즈버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찰스 다윈은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함께 학교 정원에 화학 실험실까지 마련했다.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찰스는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곤충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다. 아버지는 그를 설득했지만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한다느 사실에
거부감을 느꼈고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햤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기 때문에 수술이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19세기
유럽 의학의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과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하고
에디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흑인 해방 노예 존 에드먼스턴에게서 동물 박제 제작 방법을 배웠는데 이때 배운 제작법은 나중에 비글호의 항해에 참가해
생물 표본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학년 때는 플리니 협회에 소속해, 해양 생물의 관찰에 종사했다. 다윈은 로버트 
에그몬트 그랜트의 해양 무척추 동물의 생활환경과 해부학의 연구를 도왔다. 어느날, 그랜트는장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진화 사상을
칭찬했다. 다윈은 놀랐지만 할아버지의 책을 읽고 비슷한 개념을 알아차리고 있었고 그 생각이 논쟁적인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교의 박물학 수업은 수성론과 화성론 논쟁등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지루했다.
또한 식물의 분류를 배워서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많은 식물 수집을 자랑한 에디버러 대학교 박물관에서 연구를 도왔다.

1827년 아들이 성공회 신부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고 
본인의 흥미에 따라 식물학자 헨슬로와 지질학자 아담 세지윅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졸업했다.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 다윈을 성공회 신부로 만들기 위해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넣어 신학, 수학, 고전을 배우게 했다. 다윈은 성공회 신부가 되면 미사 집전, 성서와 신학 연구등의
교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의 대부분을 박물학에 쏟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윈의 관심은 식학이 아닌 박물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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