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한다. 누구나.
하지만 누구나 똑같이 생각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요리대가 와 비교할 수 있는 사고의 달인이 있다.
사고의 달인은 여러 가지 정신적 재료로 맛을 내고 조합하는 것에 통달한 사람이다.
만약 지적 만찬을 준비해야 한다면 그에게 부탁해야 할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사고의 부엌에서 그의 일과 우리의 일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는 우리보다 더 잘할 것이라는 뜻이다.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것이다.
우리 역시 전문가가 되고자 한다면 도구의 용법을 익히고, 정신적 요리법을 익히며 스킬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우리에게 정신적 요리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기는 정신적 요리법이 무엇을 요리하는 가에서 어떻게 요리하는가의 관점으로 옮겨지게 한다.
정신적인 요리는 마음의 공간에서 발현된다. 이 개념들이 졸여지고 튀겨지기도 하며 절여지기도 한다.
대로는 구워지고 휘어지면서 모양을 갖추어 나가게 된다.
마치 요리 전문가들이 어떤 재료는 조금 넣고 어떤 재료는 많이 넣는 등의 다양한 동작으로
우리를 놀랍게 하는 것처럼 상상의 공간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수두룩 일어날 수 있다.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오고 예상치 못한 재료들과 조합되기도 한다.
레시피 자체만 들여다보면 완성된 요리가 어떤 맛일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정신적인 요리의 전문가들은
요리의 맛이 어떤 맛일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으로 혼합한 재료의 맛을
직감으로 알아챈다.
따라서 직감이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유전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바버라 매클린 턱은 젊은 시절 옥수수밭에서 유전학 연구를 했다.
연구자들은 옥수수밭 절반 정도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임 꽃가루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30% 정도에서만 그 현상이 나타났다.
매클린 턱은 혼자 옥수수밭을 떠나 골똘히 생각했고 30분쯤 후 유레카를 외쳤다.
동료 연구원들은 그녀에게 이유를 증명해 보라고 했지만 정작 그녀는 이 깨달음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수십 년이 흐르고 매클린 턱은 이렇게 회고했다. 문제를 풀다가 답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이 떠오르게 된다면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전에 이미 무의식 속에 해답을 구한 경우라고 말이다.
안다는 것은 이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문은 창조적 사고를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통찰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우리는 직접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숫자고 옮길 수 있을까?
우리는 창조적 상상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훈련하고 연습하는 것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완전한 답을 얻지 못했다.
사색가, 발명가, 창작가들의 경험은 과소평가 되고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내적 경험들은 모든 의문을 해소해 주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중요하고 새로운 방법을 제안해 줄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경험은 사고 자체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충분하지 않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예로 들자면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 숫자와 복잡한 이론과 논리를
동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상대적으로 수학에 취약했고, 자주 동료들로부터 수학 작업을 진척시키기 위해 도움을 받았어야 했다고 한다.
"언어라는 것 글로 된 것이건 말로 된 것이건 언어는 나의 사고 과정 안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사고 과정에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심리적인 실체들은 일종의 중후들이거나 이미지들로서, 자발적으로
재생산되거나 결합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그 요소들이란 시각적이면서 근육을 갖춘 것들이다" 말했다.
매클린 턱 역시 아인슈타인이 말한 광자 개념에 해당하는 유기체적인 느낌에 대해 언급했다.
옥수수의 염색체를 연구할 때도 그녀는 밭에 있는 옥수수 개체를 줄기마다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옥수수를 진심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리처드 파인먼은 문제를 풀지 않고 느꼈다고 한다.
"수학인가 직관인가?"라고 발명가이자 소설가인 클라크가 묻는다.
"우리는 진리를 찾기 위해 모형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알아내고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식을 작동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직감과 직관, 사고 내부에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심상이 먼저 나타난다. 말이나 숫자는 이것의 표현 방식에 불과하다."
아인슈타인에게 수학이나 형식논리학이 결국 부차적인 수단이었음을 말해준다.
"기존의 말이나 기호들은 부차적인 것들이다. 심상이 먼저 나타나고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말과 기호가 필요한 것이다. 과학자는 공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렇다. 과학자들은 수학적 언어로 사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직관적인 통찰을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도록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매클린 턱은 이렇게 말하였다 "과학적 방법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직관적으로 알아낸 어떤 것을
과학의 틀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다른 과학자들도 직관적으로 깨달은 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2단계 과정을 거친다고
말하면서 매클린 턱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리처드 파인먼 또한 "수학은 우리가 본질이라고 이해한 것을 표현하는 형식일 뿐인지 이해의 내용이 아니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직관적으로 문제를 보고 느꼈던 그는 문제를 푸는 과정들을 보면 수학으로 해결하기 전에
어떤 그림 같은 것이 눈앞에 계속 나타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정교해졌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과장된 것이다. 창조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첫 번째로 느낀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해하려는 욕구는 반드시 감각적이면서도 정서적인 느낌과 함께 어우러져야 하며
지성과 통합돼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상상력 넘치는 통찰을 만들 수 있다.